전세계 공급망 쥐고 흔들 반도체·원전·방산·바이오 핵심 '린치핀' 장악하라
입력 : 2024.12.11 17:0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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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 2024.12.11 17:17:05
韓 린치핀 전략으로 산업 강국 되려면
◆ Big Picture ◆
경영 컨설팅 분야의 유명 구루 세스 고딘은 2010년 저서 '린치핀'을 통해 현대 사회에서 개인이 대체 불가능한 핵심 인재가 되려면 어떤 전략을 취해야 할 것인지를 다뤘다. 이를 위한 전략으로 문제 해결 능력과 창의적 사고, 독립적 판단력 등을 제시했다. 15년이 지난 현시점에서 린치핀 전략은 더 중요한 통찰을 준다. 린치핀의 핵심은 차별화된 경쟁력을 어떻게 확보할지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국가 단위에서 벌어지는 경쟁의 핵심은 한 나라가 다른 나라보다 어떻게 더 큰 영향력을 가질 수 있느냐다. 산업화 시대 이후 그 중심은 혁신 기술과 지식을 기반으로 한 경제성장이 있었다. 한국이 취할 수 있는 린치핀 전략도 혁신의 경쟁 구도에서 대체 불가능한 지위로 가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특정 기술에 대한 독점적 지위보다 각 산업 분야의 글로벌 공급망에서 핵심 병목 지점을 확보하는 것을 의미한다. 핵심 병목 지점이란 독점 구도가 꽤 오래 그리고 강하게 지속되는 것으로, 당분간 이 구도를 깨뜨릴 경쟁자가 나오기 힘든 구조적 특징이 있다. 이러한 병목 지점들은 긴밀하게 연계돼 있어 개별 산업은 물론 산업 간 연계 구조나 공급망 등을 고려해야 한다.
반도체 산업을 예로 들어보자. 현재 전 세계 주요 국가들의 관심사는 인공지능(AI)이다. 이른바 챗GPT 같은 파운데이션 AI를 비롯해 AI가 새롭게 창출할 시장, AI에 의해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을 현재의 산업 전체가 겪게 될 변화 등이 포함된다. 구글(알파벳), 메타(페이스북),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MS), 테슬라 같은 미국의 주요 정보기술(IT) 대기업은 더 강력한 AI 알고리즘을 만들고, 이를 기반으로 예측하는 영역에서 확고한 지배력을 가지려 경쟁한다.
파운데이션 AI를 다음 세대의 정보 기반 서비스 산업으로 건너가기 위한 하나의 병목 지점으로 본다면 그곳을 선점한 기업들은 오픈AI, MS, 알파벳, 메타, 앤스로픽 등이 될 것이다. 이들 기업은 경쟁적으로 더 개선된 성능의 AI 알고리즘을 하루가 멀다 하고 내놓고 있지만 결국 이러한 작업을 할 수 있는 회사는 극소수다. 자본력과 기술력으로 AI 산업 전체의 방향성이 결정되는 만큼 이 기업들은 AI 산업의 최전선에 있는 병목 지점이 된다.
한층 더 깊이 들어가보면 고성능 AI 전용 반도체 생산에서도 병목 지점이 있다. 미국의 대표 반도체 기업인 엔비디아가 그렇다. 현재 AI 서비스 기업들의 역량을 판가름하는 기준으로 엔비디아의 AI 서버용 그래픽처리장치(GPU) 칩 보유 개수를 삼을 정도다. 이 기준으로 따지면 메타와 MS가 15만대로 최정상 그룹에 속하고, 알파벳·아마존·오라클 등이 5만대로 2위 그룹에 위치한다. 한국은 국가 전체를 통틀어도 서버급 AI 전용 GPU칩이 총 3000대가 안 되는 것으로 파악된다. AI 산업에서 이미 병목 지점 선점 그룹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이 병목 지점에는 더 핵심적인 게 있다. 엔비디아는 팹리스 기업으로 반도체 소자가 집적된 웨이퍼를 직접 생산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 생산은 세계 최정상 파운드리 업체인 대만의 TSMC가 담당한다. 파운드리 전문 기업인 TSMC는 뛰어난 공정 기술력에 더해 다양한 칩 구성 요소를 결합해 하나의 칩으로 만들 수 있는 설계·공정 최적화 기술로 시장을 선도하고 있다. 현재 모바일부터 초대형 AI GPU 서버에 이르기까지 첨단 반도체 칩 제조라는 병목 지점은 TSMC가 사실상 독점하고 있는 상황이다.
국내 기업 중에서는 SK하이닉스가 하나의 병목 지점을 선점하고 있다. 산술논리연산을 담당하는 코어와 데이터가 저장된 메모리 셀 사이의 속도 격차로 인한 '메모리 장벽'을 완화할 수 있는 맞춤형 메모리 제작 분야가 그 대상이다. SK하이닉스는 2010년대 초반부터 고대역폭메모리(HBM)를 디램(DRAM) 기반으로 제조하기 시작해 2010년대 중반 이후 HBM3, HBM3E 등 엔비디아의 GPU와 연결할 수 있는 AI 맞춤형 메모리 주력 파트너사가 됐다. 현재의 기술 방식이 지속되는 한 SK하이닉스는 AI 특화 하드웨어의 한 축으로 작동하는 병목 지점을 거의 독점하는 수준까지 도달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처럼 AI 산업 분야에는 복수의 층위에 걸쳐 여러 병목 지점이 자리 잡고 있다. 그 병목 지점들은 압도적인 기술력으로 혁신을 주도할 수 있는 소수의 기업이 선점한 상태다. 이러한 병목 지점의 특징은 당분간 다른 기술로 대체 불가능한 기술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신규 경쟁 업체들의 진입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기술의 병목 지점이 린치핀으로서 갖는 의미는 AI나 반도체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한국 입장에서는 지금까지 국부 창출에 기여한 제조업 역시 중요하다. 기존 산업들의 경쟁력을 혁신적으로 전환할 린치핀 전략 개발이 중요한 까닭이다. 중국이라는 강력한 경쟁 상대가 일부 분야를 위협하거나 이미 추월한 지금 한국이 더 전략적으로 점유해야 하는 린치핀은 아직 많이 있다.
당장 AI와 반도체 산업만 해도 아직 많은 혁신이 필요하다. 첨단 패키징은 AI 반도체는 물론 주문형 첨단 시스템 반도체 생산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 기술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대만의 주요 기업들이 현재 이 시장을 절반 이상 점유하고 있지만 첨단 패키징 기술은 더 높은 수준의 새로운 혁신을 요구한다. 서로 다른 칩들을 하나로 연결하는 기술이나 발열 성능 개선도 중요한 병목 지점이 될 수 있다. 한국의 반도체 전략 중 하나는 첨단 패키징 분야에서 부각되고 있는 이러한 기술 병목 지점의 기술 개발에 투자를 늘리고 산업 표준을 이끌 수 있는 기술을 점유하는 것이다.
반도체 팹리스 역시 중요한 린치핀이 될 수 있다. 전 세계 수많은 AI 반도체 설계 스타트업들은 엔비디아의 GPU와 경쟁할 수 있는 고성능 AI 반도체 개발에 집중하려 한다. 하지만 시스템 반도체의 진짜 린치핀은 엔비디아가 독점한 AI 가속기 시장에만 있지 않다. 각 산업의 혁신 엔진이 될 수 있는 도메인 지식에 특화해 설계된 반도체가 훨씬 더 높은 가치를 지닐 수 있다.
바이오산업이 단적인 예다. 2024년 노벨화학상이 단백질 구조 설계에 특화된 딥러닝 모델인 '알파폴드'와 '로제타폴드'에 수여된 사실에서도 볼 수 있듯이 바이오산업 역시 AI에 기반한 비가역적인 기술 전환 과정에 들어섰다. 뇌·컴퓨터 인터페이스 전용 시스템 반도체 또한 급성장하는 첨단 바이오산업에서 앞으로 더욱 중요한 린치핀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새로운 종류의 시스템 반도체들은 엔비디아의 GPU에만 의존할 필요는 없다. 해당 산업에서 다뤄지는 전문적 도메인 지식이 담긴 데이터 특성과 그 데이터에 특화된 효과적인 연산을 지원하는 반도체가 더 유리하다.
한국에서 반도체와 AI에 기반을 둔 타 산업 린치핀이 나올 수 있으려면 이종 간 영역을 하나로 연결할 수 있는 칩 설계가 가능한 팹리스 업체들이 더 많이 등장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팹리스들이 자신들이 설계한 칩을 테스트하고 수요 기업에 공급할 수 있는 테스트베드도 충분히 확충돼야 한다. 이를 위해 정부가 공공 연구개발(R&D) 팹과 테스트 시스템을 구축하는 전략을 구상할 수 있다. 특히 공공 R&D팹은 아예 규모를 확대해 일종의 공기업 개념인 KSMC(Korea Semiconductor Manufacturing Corporation)로 만드는 방법도 고려할 수 있다. 이에 대한 벤치마킹은 다름 아닌 대만의 TSMC다. TSMC도 1987년 첫 시작은 대만 행정부의 지원을 받아 설립된 일종의 공기업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산업 분야에서는 자동화 기술이 린치핀이 될 수 있다. 저출생 고령화 기조에 따라 노동력을 대체할 만한 수준의 자동화 시스템 기술이 필요하다. AI와 로봇 기술이 경쟁력을 창출할 수 있는 제조업 분야로는 정밀화학과 제약, 촉매 같은 첨단 신소재 기반 고부가가치 산업을 꼽을 수 있다. 이들 분야는 기존의 제조업처럼 대규모 생산이 필요하지 않으므로 중국과 일대일 양산 경쟁, 원가 경쟁을 벌일 필요가 없다. 오히려 다품종 소량 생산만으로도 큰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기에 린치핀으로 변신할 제조업은 바로 이러한 고부가가치 신소재 산업이다.
세계 곳곳에서 지정학적 리스크가 높아지는 만큼 방위산업 분야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방위산업 역시 기본적인 제조업 역량 강화와 더불어 첨단기술을 도입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불확실성을 줄일 수 있느냐에 의해 그 산업의 린치핀이 결정된다. 한국의 방위산업은 북한을 마주하고 있다는 안보적 특수성 외에도 한반도의 기후와 지형이 다양한 테스트에 적합한 플랫폼이 된다는 고유 특성으로 인해 다른 나라가 필요로 하는 안보 자산을 고품질로 생산해 공급하는 것에 강점을 가질 수 있다. 특히 점차 무인화되고 있는 전략 시스템은 한국이 가진 IT 산업과 반도체산업 그리고 인공지능과 연계해 강화될 수 있는 또 하나의 린치핀이 될 수 있다.
에너지 산업도 한국의 린치핀 전략 재구상 과정에서 반드시 고려해야 할 요소다. 반도체·데이터센터 같은 대규모 전력 소모 산업은 물론 자동차를 비롯한 대부분의 제조업은 안정적인 전력 공급이 필수다. 신재생에너지 비중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간헐성에 대응하기 위해 대용량 에너지저장시스템 같은 기반시설을 확충하고, 전력 소모가 집중되는 지역으로 송배전되는 체계가 갖춰져야 한다. 태양전지 효율 강화나 수소에너지 생산 효율 강화 같은 기본적인 신재생에너지 시스템용 소재와 소자 성능 강화 기술은 물론 스마트그리드 설계와 최적화를 그러한 예로 생각할 수 있다.
비탄소 배출 기저 전원으로서 원전은 한국이 반드시 보존해야 하는 에너지 린치핀이다. 현재 민주주의를 채택한 선진국 그룹에서 원자력 발전 시스템을 설계하고 운영할 수 있는 기술과 폐기물 처리 노하우까지 동시에 갖춘 나라는 한국·프랑스 정도밖에 없다. 또 안정적인 방사성 동위원소 생산과 핵물질·폐기물 재처리 기술, 핵융합발전으로 연계되는 산업 기반 확보라는 측면에서도 반드시 장기적 안목으로 지켜나가야 한다. 소형모듈원전(SMR) 상용화 등 기술적 전환기를 앞둔 상황에서 한국의 원전 산업이 지속적인 린치핀을 가지려면 다른 국가들을 대상으로 한 에너지 공급자로서 영향력까지 고려한 전략이 필요하다.
한국이 린치핀 전략을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으로 구상하려면 기후위기를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기후위기는 이번 세기 내내 가장 대응하기 쉽지 않은 비가역적 변동성이 될 것이다. 한국이 기후재난을 버틸 수 있는 산업을 재정비할 수 있다면 이는 지속가능성이라는 가장 중요한 병목 지점을 선점하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위에서 알아본 다양한 산업들은 한국이 이미 글로벌 수준에서 경쟁력을 갖춘 산업이지만 동시에 조만간 위기에 봉착하게 될 산업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다행히 한국이 추진하게 될 전략, 특히 첨단산업과 제조업을 결합해 산업의 판도를 다시 짜면서 린치핀으로 만들 수 있는 대책은 다른 경쟁국들이 답습하기는 어렵다. 한국이 보유한 모든 글로벌 수준의 산업이 10, 20년 후에도 살아남을 것이라고 보장할 수 없지만 지금까지 알아본 변신의 방법을 시도하며 돌다리를 두드리면서 나아갈 수밖에 없다. 각 산업에서 린치핀을 먼저 발견하고 전략적으로 국가의 자원을 적시에 투자하며 중장기적인 산업 정책 계획을 계속 수립해야 한다.
린치핀(Linchpin)
마차나 자동차의 두 바퀴를 연결하는 쇠막대기를 고정하는 핀으로, 핵심적이고 중요한 것을 가리킬 때 자주 사용한다. 린치핀 전략은 조직 등에서 절대 대체할 수 없는 인재 또는 존재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권석준 성균관대 화학공학과 교수 '반도체 삼국지' 저자]
◆ Big Picture ◆
경영 컨설팅 분야의 유명 구루 세스 고딘은 2010년 저서 '린치핀'을 통해 현대 사회에서 개인이 대체 불가능한 핵심 인재가 되려면 어떤 전략을 취해야 할 것인지를 다뤘다. 이를 위한 전략으로 문제 해결 능력과 창의적 사고, 독립적 판단력 등을 제시했다. 15년이 지난 현시점에서 린치핀 전략은 더 중요한 통찰을 준다. 린치핀의 핵심은 차별화된 경쟁력을 어떻게 확보할지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국가 단위에서 벌어지는 경쟁의 핵심은 한 나라가 다른 나라보다 어떻게 더 큰 영향력을 가질 수 있느냐다. 산업화 시대 이후 그 중심은 혁신 기술과 지식을 기반으로 한 경제성장이 있었다. 한국이 취할 수 있는 린치핀 전략도 혁신의 경쟁 구도에서 대체 불가능한 지위로 가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특정 기술에 대한 독점적 지위보다 각 산업 분야의 글로벌 공급망에서 핵심 병목 지점을 확보하는 것을 의미한다. 핵심 병목 지점이란 독점 구도가 꽤 오래 그리고 강하게 지속되는 것으로, 당분간 이 구도를 깨뜨릴 경쟁자가 나오기 힘든 구조적 특징이 있다. 이러한 병목 지점들은 긴밀하게 연계돼 있어 개별 산업은 물론 산업 간 연계 구조나 공급망 등을 고려해야 한다.
반도체 산업을 예로 들어보자. 현재 전 세계 주요 국가들의 관심사는 인공지능(AI)이다. 이른바 챗GPT 같은 파운데이션 AI를 비롯해 AI가 새롭게 창출할 시장, AI에 의해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을 현재의 산업 전체가 겪게 될 변화 등이 포함된다. 구글(알파벳), 메타(페이스북),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MS), 테슬라 같은 미국의 주요 정보기술(IT) 대기업은 더 강력한 AI 알고리즘을 만들고, 이를 기반으로 예측하는 영역에서 확고한 지배력을 가지려 경쟁한다.
파운데이션 AI를 다음 세대의 정보 기반 서비스 산업으로 건너가기 위한 하나의 병목 지점으로 본다면 그곳을 선점한 기업들은 오픈AI, MS, 알파벳, 메타, 앤스로픽 등이 될 것이다. 이들 기업은 경쟁적으로 더 개선된 성능의 AI 알고리즘을 하루가 멀다 하고 내놓고 있지만 결국 이러한 작업을 할 수 있는 회사는 극소수다. 자본력과 기술력으로 AI 산업 전체의 방향성이 결정되는 만큼 이 기업들은 AI 산업의 최전선에 있는 병목 지점이 된다.
한층 더 깊이 들어가보면 고성능 AI 전용 반도체 생산에서도 병목 지점이 있다. 미국의 대표 반도체 기업인 엔비디아가 그렇다. 현재 AI 서비스 기업들의 역량을 판가름하는 기준으로 엔비디아의 AI 서버용 그래픽처리장치(GPU) 칩 보유 개수를 삼을 정도다. 이 기준으로 따지면 메타와 MS가 15만대로 최정상 그룹에 속하고, 알파벳·아마존·오라클 등이 5만대로 2위 그룹에 위치한다. 한국은 국가 전체를 통틀어도 서버급 AI 전용 GPU칩이 총 3000대가 안 되는 것으로 파악된다. AI 산업에서 이미 병목 지점 선점 그룹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이 병목 지점에는 더 핵심적인 게 있다. 엔비디아는 팹리스 기업으로 반도체 소자가 집적된 웨이퍼를 직접 생산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 생산은 세계 최정상 파운드리 업체인 대만의 TSMC가 담당한다. 파운드리 전문 기업인 TSMC는 뛰어난 공정 기술력에 더해 다양한 칩 구성 요소를 결합해 하나의 칩으로 만들 수 있는 설계·공정 최적화 기술로 시장을 선도하고 있다. 현재 모바일부터 초대형 AI GPU 서버에 이르기까지 첨단 반도체 칩 제조라는 병목 지점은 TSMC가 사실상 독점하고 있는 상황이다.
국내 기업 중에서는 SK하이닉스가 하나의 병목 지점을 선점하고 있다. 산술논리연산을 담당하는 코어와 데이터가 저장된 메모리 셀 사이의 속도 격차로 인한 '메모리 장벽'을 완화할 수 있는 맞춤형 메모리 제작 분야가 그 대상이다. SK하이닉스는 2010년대 초반부터 고대역폭메모리(HBM)를 디램(DRAM) 기반으로 제조하기 시작해 2010년대 중반 이후 HBM3, HBM3E 등 엔비디아의 GPU와 연결할 수 있는 AI 맞춤형 메모리 주력 파트너사가 됐다. 현재의 기술 방식이 지속되는 한 SK하이닉스는 AI 특화 하드웨어의 한 축으로 작동하는 병목 지점을 거의 독점하는 수준까지 도달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처럼 AI 산업 분야에는 복수의 층위에 걸쳐 여러 병목 지점이 자리 잡고 있다. 그 병목 지점들은 압도적인 기술력으로 혁신을 주도할 수 있는 소수의 기업이 선점한 상태다. 이러한 병목 지점의 특징은 당분간 다른 기술로 대체 불가능한 기술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신규 경쟁 업체들의 진입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기술의 병목 지점이 린치핀으로서 갖는 의미는 AI나 반도체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한국 입장에서는 지금까지 국부 창출에 기여한 제조업 역시 중요하다. 기존 산업들의 경쟁력을 혁신적으로 전환할 린치핀 전략 개발이 중요한 까닭이다. 중국이라는 강력한 경쟁 상대가 일부 분야를 위협하거나 이미 추월한 지금 한국이 더 전략적으로 점유해야 하는 린치핀은 아직 많이 있다.
당장 AI와 반도체 산업만 해도 아직 많은 혁신이 필요하다. 첨단 패키징은 AI 반도체는 물론 주문형 첨단 시스템 반도체 생산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 기술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대만의 주요 기업들이 현재 이 시장을 절반 이상 점유하고 있지만 첨단 패키징 기술은 더 높은 수준의 새로운 혁신을 요구한다. 서로 다른 칩들을 하나로 연결하는 기술이나 발열 성능 개선도 중요한 병목 지점이 될 수 있다. 한국의 반도체 전략 중 하나는 첨단 패키징 분야에서 부각되고 있는 이러한 기술 병목 지점의 기술 개발에 투자를 늘리고 산업 표준을 이끌 수 있는 기술을 점유하는 것이다.
반도체 팹리스 역시 중요한 린치핀이 될 수 있다. 전 세계 수많은 AI 반도체 설계 스타트업들은 엔비디아의 GPU와 경쟁할 수 있는 고성능 AI 반도체 개발에 집중하려 한다. 하지만 시스템 반도체의 진짜 린치핀은 엔비디아가 독점한 AI 가속기 시장에만 있지 않다. 각 산업의 혁신 엔진이 될 수 있는 도메인 지식에 특화해 설계된 반도체가 훨씬 더 높은 가치를 지닐 수 있다.
바이오산업이 단적인 예다. 2024년 노벨화학상이 단백질 구조 설계에 특화된 딥러닝 모델인 '알파폴드'와 '로제타폴드'에 수여된 사실에서도 볼 수 있듯이 바이오산업 역시 AI에 기반한 비가역적인 기술 전환 과정에 들어섰다. 뇌·컴퓨터 인터페이스 전용 시스템 반도체 또한 급성장하는 첨단 바이오산업에서 앞으로 더욱 중요한 린치핀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새로운 종류의 시스템 반도체들은 엔비디아의 GPU에만 의존할 필요는 없다. 해당 산업에서 다뤄지는 전문적 도메인 지식이 담긴 데이터 특성과 그 데이터에 특화된 효과적인 연산을 지원하는 반도체가 더 유리하다.
한국에서 반도체와 AI에 기반을 둔 타 산업 린치핀이 나올 수 있으려면 이종 간 영역을 하나로 연결할 수 있는 칩 설계가 가능한 팹리스 업체들이 더 많이 등장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팹리스들이 자신들이 설계한 칩을 테스트하고 수요 기업에 공급할 수 있는 테스트베드도 충분히 확충돼야 한다. 이를 위해 정부가 공공 연구개발(R&D) 팹과 테스트 시스템을 구축하는 전략을 구상할 수 있다. 특히 공공 R&D팹은 아예 규모를 확대해 일종의 공기업 개념인 KSMC(Korea Semiconductor Manufacturing Corporation)로 만드는 방법도 고려할 수 있다. 이에 대한 벤치마킹은 다름 아닌 대만의 TSMC다. TSMC도 1987년 첫 시작은 대만 행정부의 지원을 받아 설립된 일종의 공기업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산업 분야에서는 자동화 기술이 린치핀이 될 수 있다. 저출생 고령화 기조에 따라 노동력을 대체할 만한 수준의 자동화 시스템 기술이 필요하다. AI와 로봇 기술이 경쟁력을 창출할 수 있는 제조업 분야로는 정밀화학과 제약, 촉매 같은 첨단 신소재 기반 고부가가치 산업을 꼽을 수 있다. 이들 분야는 기존의 제조업처럼 대규모 생산이 필요하지 않으므로 중국과 일대일 양산 경쟁, 원가 경쟁을 벌일 필요가 없다. 오히려 다품종 소량 생산만으로도 큰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기에 린치핀으로 변신할 제조업은 바로 이러한 고부가가치 신소재 산업이다.
세계 곳곳에서 지정학적 리스크가 높아지는 만큼 방위산업 분야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방위산업 역시 기본적인 제조업 역량 강화와 더불어 첨단기술을 도입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불확실성을 줄일 수 있느냐에 의해 그 산업의 린치핀이 결정된다. 한국의 방위산업은 북한을 마주하고 있다는 안보적 특수성 외에도 한반도의 기후와 지형이 다양한 테스트에 적합한 플랫폼이 된다는 고유 특성으로 인해 다른 나라가 필요로 하는 안보 자산을 고품질로 생산해 공급하는 것에 강점을 가질 수 있다. 특히 점차 무인화되고 있는 전략 시스템은 한국이 가진 IT 산업과 반도체산업 그리고 인공지능과 연계해 강화될 수 있는 또 하나의 린치핀이 될 수 있다.
에너지 산업도 한국의 린치핀 전략 재구상 과정에서 반드시 고려해야 할 요소다. 반도체·데이터센터 같은 대규모 전력 소모 산업은 물론 자동차를 비롯한 대부분의 제조업은 안정적인 전력 공급이 필수다. 신재생에너지 비중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간헐성에 대응하기 위해 대용량 에너지저장시스템 같은 기반시설을 확충하고, 전력 소모가 집중되는 지역으로 송배전되는 체계가 갖춰져야 한다. 태양전지 효율 강화나 수소에너지 생산 효율 강화 같은 기본적인 신재생에너지 시스템용 소재와 소자 성능 강화 기술은 물론 스마트그리드 설계와 최적화를 그러한 예로 생각할 수 있다.
비탄소 배출 기저 전원으로서 원전은 한국이 반드시 보존해야 하는 에너지 린치핀이다. 현재 민주주의를 채택한 선진국 그룹에서 원자력 발전 시스템을 설계하고 운영할 수 있는 기술과 폐기물 처리 노하우까지 동시에 갖춘 나라는 한국·프랑스 정도밖에 없다. 또 안정적인 방사성 동위원소 생산과 핵물질·폐기물 재처리 기술, 핵융합발전으로 연계되는 산업 기반 확보라는 측면에서도 반드시 장기적 안목으로 지켜나가야 한다. 소형모듈원전(SMR) 상용화 등 기술적 전환기를 앞둔 상황에서 한국의 원전 산업이 지속적인 린치핀을 가지려면 다른 국가들을 대상으로 한 에너지 공급자로서 영향력까지 고려한 전략이 필요하다.
한국이 린치핀 전략을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으로 구상하려면 기후위기를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기후위기는 이번 세기 내내 가장 대응하기 쉽지 않은 비가역적 변동성이 될 것이다. 한국이 기후재난을 버틸 수 있는 산업을 재정비할 수 있다면 이는 지속가능성이라는 가장 중요한 병목 지점을 선점하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위에서 알아본 다양한 산업들은 한국이 이미 글로벌 수준에서 경쟁력을 갖춘 산업이지만 동시에 조만간 위기에 봉착하게 될 산업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다행히 한국이 추진하게 될 전략, 특히 첨단산업과 제조업을 결합해 산업의 판도를 다시 짜면서 린치핀으로 만들 수 있는 대책은 다른 경쟁국들이 답습하기는 어렵다. 한국이 보유한 모든 글로벌 수준의 산업이 10, 20년 후에도 살아남을 것이라고 보장할 수 없지만 지금까지 알아본 변신의 방법을 시도하며 돌다리를 두드리면서 나아갈 수밖에 없다. 각 산업에서 린치핀을 먼저 발견하고 전략적으로 국가의 자원을 적시에 투자하며 중장기적인 산업 정책 계획을 계속 수립해야 한다.
린치핀(Linchpin)
마차나 자동차의 두 바퀴를 연결하는 쇠막대기를 고정하는 핀으로, 핵심적이고 중요한 것을 가리킬 때 자주 사용한다. 린치핀 전략은 조직 등에서 절대 대체할 수 없는 인재 또는 존재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권석준 성균관대 화학공학과 교수 '반도체 삼국지'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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